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를린 회의 (문단 편집) == 왜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개최하였는가? == [[독일 제국]]은 발칸 반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외교적 중재를 자처한 까닭은, 유럽에서 평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독일 제국에게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외교정책을 요약하자면 '프랑스 왕따시키기'였다. 이 중에서도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맺은 [[3제 동맹]]이 핵심이었다. 문제는, 유럽 내에서 분쟁이 생기면서 전쟁과 같은 혼란이 생기면 프랑스에게 우방국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 이는 비스마르크에게 최악의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막고자 베를린 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또한 독일은 발칸 반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중재자로 활동하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독일', '영토욕심이 없는 독일'과 같은 이미지를 각국에 심어줄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매력적인 요인이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 개최 연설에서 "우리 독일은 이 위기상황을 통해 어떤 이득도 얻으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헨리 키신저]]는 이 시기 독일이 [[고립주의]]를 채택하기에는 너무나 [[강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적국이 될 수 있는 국가들과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놓고자 베를린 회의를 개최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키신저는 [[냉전]]기 [[미국]] 정부에서의 행적으로 흔히 기억되지만 [[19세기]] 유럽사에 정통한 역사학자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